자료실

  • 학내규칙/관련법
    • 학내규칙
    • 관련법
  • 관련사이트
  • 관련자료
  • 뉴스레터

뉴스레터

자료실_관련뉴스 게시글의 상세 화면
섹스칼럼니스트 은하선, 당신의 욕망은 당신 것인가?
작성자 황진아 등록일 2018-03-23 조회수 2883
평생 처음 보는 물건들 앞에서 당혹스러웠다. 너무 엄숙하거나 심각한 표정을 지어도 민망한 일이고, 이 나이에 당황하거나 쑥스러운 기색을 보이는 것도 멋쩍은 일인데… 지금 내가 어떤 표정을 짓고 있는지 거울이라도 보고 싶었다. 

“이거 잡아 보세요. 여길 누르면 이렇게 진동이 와요.”

그는 나 같은 ‘고객’을 수없이 만나본 듯 담담하게 설명을 이어갔다. 고운 헝겊으로 여성 성기 모양을 본떠 만든 모형에 대고, 그는 바이브레이터가 달린 기구를 사용하는 법을 보여줬다. 너비 1미터 남짓한 4단 짜리 선반 위에는 다양한 모양과 색깔의 소품들이 오밀조밀하게 진열되어 있었다. 손바닥에 쏙 들어오는 달걀 모양에서부터 작은 물오리, 빨간 체리가 꽂힌 컵케이크, 아이스크림콘 모양이나 에펠탑 모형의 자위 기구까지, 그 기발함과 발랄함에 피식 웃음을 터뜨리는 나를 보며 그가 명함을 내밀었다.

‘은하선. 섹스를 하고 글을 씁니다. 그리고 섹스토이’

<이기적 섹스>(동녘, 2015년 출간)의 저자이자 섹스칼럼니스트, 섹스토이숍 운영자로 알려진 은하선(30) 작가를 만나러 온 길이었다. 그는 최근 교육방송(EBS)의 <까칠남녀> 패널에서 하차하며 논란의 중심에 섰다. 국내 최초의 젠더토크쇼를 표방하며 지난해 봄 첫 방송을 낸 <까칠남녀>는 피임, 자위, 졸혼, 낙태, 데이트폭력 등 민감한 주제를 다루며 큰 반향을 불러일으켰고, 지난해 12월과 올 1월 성소수자 문제를 2회 연속 특집으로 방영하면서 보수 교회와 일부 학부모단체의 거센 항의에 직면했다. 지난달 13일, 종영 2회를 남기고 은하선이 돌연 프로그램 하차 통보를 받았을 때, 교육방송 측에선 그가 “방송 출연자로서 부적절한 처신을 했기 때문에 내린 결정일 뿐 성소수자 문제와는 무관하다”고 밝혔으나, 의혹은 쉽게 가라앉지 않았다.

프로그램에 함께 출연하던 패널 이현재, 손아람, 손희정이 항의의 표시로 녹화를 보이콧했고 40여개 여성, 언론, 교육, 성소수자 단체들도 ‘공영방송이 소수자의 인권을 외면하고 호모포비아(동성애 혐오론)에 굴복한 것은 용납할 수 없다’며 시위를 벌였지만, 그들의 주장은 받아들여지지 않았다. 결국 <까칠남녀>는 2월5일 방송을 끝으로 조기 종영했다. 한 반동성애자 단체에서는 ‘까칠남녀 조기종영에 대한 성명서’를 통해 성소수자를 출연시킨 교육방송의 공식사과와 책임자 문책을 요구하면서 “섹스도구를 판매하는 동성애자 여성”을 고정패널로 출연시켰다는 점에 대해 격렬한 반감을 표명했다. 양성애자 페미니스트이며 섹스토이숍 운영자인 은하선을 가리키는 말이었다. 

성소수자 문제와 성 담론, 국가교육, 공영방송의 역할이라는 묵직한 키워드들이 날카롭게 교차하는 논쟁의 정점에 서게 된 인물, 서른 살의 젊은 여자 은하선이 생각하는 성(性)이란 무엇일까? 그는 왜 숱한 비난을 감수하면서 섹스에 대한 도발적인 문제제기를 이어가고 있는 걸까? 지난달 31일 은하선을 만난 곳은 서울 홍대 앞 그의 파트너가 운영한다는 아담한 레스토랑이었다. 열 평 남짓한 레스토랑 한쪽 구석에 ‘은하선 토이즈’에서 운영하는 작은 매대가 놓여 있었다. 아직 개점 시간 전이라 식당엔 우리뿐이었다.

섹스칼럼 쓰면서 섹스토이숍 운영
보수 교회와 일부 학부모단체 항의로
최근 교육방송 <까칠남녀> 패널 하차
방송사, “부적절한 처신을 했기 때문”
‘공영방송이 호모포비아에 굴복’ 논란

예중·예고 거쳐 2008년 음대에 진학
초등학생 때부터 대학 들어갈 때까지
같은 강사에게 지속적 성추행당해
베를린필 마스터 클래스 받았으나
“이건 한국만의 문제 아니구나 생각”

성이 자유로워졌다는 착시현상

-난 얼치기 페미니스트예요. 대학 다닐 때 여성주의를 표방하는 학생운동에 참여하기는 했지만, 우리 세대 페미니즘은 지금이랑 크게 달라서….

“그렇게 다르다고 대개들 생각하세요.”

그가 잘라 말했다. 뜻밖이었다.

-다르지 않다고요?

“제가 강의나 워크숍 할 때 40~50대 여성분들도 많이 오시는데, 요즘 애들은 자기들 20대랑 많이 다를 것이다 기대하고 오셨다가 오히려 실망해서 가시는 경우가 많았어요.”

-왜요?

“최근 몇 년 사이에 ‘페미니즘 리부트’(2015년 전후로 등장한 페미니즘 열풍)로 ‘성에 대해 더 자유롭게 이야기할 수 있는 여성들이 나타났다’는 얘기가 나오는데, 전 그런 의견에 좀 양가적인 감정이 들어요. 제가 책을 냈을 때도 여성이 섹스에 대해 말했기 때문에 주목을 받은 측면이 있다고 보거든요. 그건 역으로, 대다수의 여성들이 아직도 섹스에 대해 말하기 힘든 상황이란 뜻이에요. 여자가 섹스에 대해 말하면 여전히 ‘걸레’ 취급 받으니까.”

-그래도 과거에 비하면 상대적으로 나아진 편 아닌가요?

“제가 여성가족재단의 지원을 받아서 ‘하는여자 페스티벌’이란 행사를 한 적이 있어요. 여성들의 섹스담론을 모아보자는 취지였는데, ‘섹스라는 단어, 여성 성기를 가리키는 단어를 쓰지 말라’는 지침이 있었어요. 놀라웠던 건, 10~15년 전에 정부 지원을 받았던 비슷한 사업에선 그런 단어들이 아무 제재 없이 쓰였다는 점이에요. 이명박근혜 정부를 지나면서 더 보수화되었다는 얘기죠. 지금이.”

-그래도 여성을 위한 섹스토이숍 같은 건 새로운 현상 아닌가요? 

“맞아요. 여성들이 섹스토이를 사기 시작하면서 대형 도매업체들도 여성을 대상으로 대대적으로 마케팅을 벌일 정도니까요. 하지만 토이숍이 느는 걸 가지고, ‘성에 대해 자유롭게 말할 수 있는 여성이 늘어났다’는 의미로 해석하긴 어려울 것 같아요. 여성이 소비자로 등장하는 것과 여성이 섹스의 주체로 등장하는 건 별개의 문제죠. 화장품 체인점이 많아진다고 여성의 지위가 높아지는 게 아니듯이 말이에요.”

-그럴 수도 있겠네요. 섹스토이의 주요 구매자층은 어떻게 돼요? 연령대라든가….

“음…. 평균 내기가 정말 어려워요. 엄마랑 딸이 같이 오는 경우도 있고요.”

-아, 그래요?

“선생님 같은 50대 여성들도 친구분들이랑 와서 ‘얘는 아이를 둘이나 낳았는데 아직도 자기 것이 어떻게 생겼는지 모른대요’ 하면서 저한테 교육을 좀 시켜줄 수 있냐고 물으세요. 그 나이 돼서도 잘 모른다는 걸 아주 창피하게 생각하시면서요. 반면에 10대 여성들은 섹스에 대해 아는 게 창피한 거잖아요. 그러다가 20~30대가 되면 갑자기 <섹스앤더시티>에 나오는 주인공처럼 섹스에 대해 주체적인 존재가 되어야 ‘힙’하다고 여기면서 속옷 색깔 맞춰 사고 하다가, 다시 결혼할 때가 되면 처녀막을 가져야 한다고 생각하고(웃음)…. 이 사회는 여성이 섹스를 해도 창피, 안 해도 창피, 알아도 창피, 몰라도 창피하게 만드는 세상 같아요.”


여성에게는 비밀인 여성의 몸

-그렇게 말씀하시니 진짜 창피한 얘기를 좀 해야겠네요. ‘은하선 토이즈’ 온라인쇼핑몰을 둘러보려고 들어갔는데 ‘성인인증이 필요하다’는 팝업창이 뜨더라고요. 이크! 움찔했어요. 내 실명까지 넣고 이런 사이트에 들어가도 괜찮을까, 기록이 남으면 어쩌지, 순간 망설였어요.

“충분히 그러실 만해요. 성인이라도 실명 인증하고 들어오는 건 굉장히 불편하고 부담스러운 일이에요. 온라인 섹스토이숍을 방문하기 위해서 성인 인증하는 나라는 우리밖에 없어요. 유럽 어디도 안 그렇고, 중국, 일본 다 안 그래요. 우리나라에선 청소년한테 파는 게 금지된 성기구 물품들이 있거든요.”

-어떤 것들이요? 콘돔은 가능한 거죠?

“일반콘돔은 괜찮은데, 표면에 돌기가 있는 콘돔은 금지물품이에요. 여성가족부 청소년보호위원회에서 정한 고시에 따르면 모든 기능성 콘돔은 다 ‘청소년유해물건’으로 분류돼요. 돌기가 있는 콘돔은 청소년들이 쾌락을 느낄 수 있기 때문에 안 된대요.”

-쾌락을 느끼면 안 된다고요? 청소년이 콘돔은 써도 되는데 쾌락을 느끼는 건 법적 제재 대상이다?

“웃기는 얘기죠. 청소년들한테 전자발찌 채워서 하려고 하면 벨 울리고 이렇게 할 것도 아니잖아요.(웃음) 저는 성인용품이란 용어 자체가 잘못되었다고 봐요. 성인용품이 아니라 그냥 성기구라고 부르는 게 맞죠. 여성용 성기구로 청소년에게 불허되는 것 중엔 ‘남성 성기 모양의 모터가 달린 것’도 있어요. 아까 보셔서 아시겠지만 성기 모양이 아니고 오리나 컵케이크 모양이면 어떤지 규정이 없어요. 신고가 들어왔다며 찾아오는 경찰들도 난감해하세요. 이건 뭐 어떻게 되는 거냐? 자기들도 당황스럽다 하시면서.(웃음)”

-하하하, 경찰관들도 처음 보는 걸 테니…. 규정에도 없고.

“여성이 쓰는 성기구라고 하면 남성 성기를 대체하는 거라고 생각해요. 여성들이 섹스를 할 때 삽입을 해야 즐거움을 느낀다는 페니스 중심적인 사고가 녹아 있죠. 클리토리스를 자극하는 용도로 쓰이는 컵케이크나 오리를 보고도 사람들은 ‘이걸 어떻게 넣냐?’고 물어봐요.(웃음)”

-솔직히 말하면 전 이런 도구들에 대해서 심리적 저항감 같은 게 있는 것 같아요. 섹스는 사랑하는 사람들 간의 성스러운 의식인데, 사랑한다면 좀 서투르거나 어설퍼도 충분히 즐거울 수 있어야 하는 것 아닐까. 굳이 구차하게 도구까지 써가면서 쾌락을 느껴야 하나? 이런 생각은 내 안의 보수성일까요?

“아뇨, 전 충분히 그럴 수 있다고 생각해요. ‘나는 사랑하는 사람하고만 하고 싶어’ 본인이 그걸 원한다면 존중받아야 하는 거죠. 그런 상황에서 ‘너는 아직 깨이지 않았구나. 성의 자유를 느끼려면 원나잇도 해보고 이런저런 섹스도 해봐야 해’라고 말하는 건 그야말로 폭력이죠. 문제는, 자기가 가진 섹스에 대한 생각을 모든 사람에게 적용하는 거예요. 본인이 안 하는 섹스는 모두 변태적이고 혐오스러운 걸로 가정하는 거요. 섹스토이가 무슨 전설의 요술봉도 아니고, 자동적으로 오르가슴을 갖다주는 것도 아니에요. 전부가 섹스토이를 사용해야 하는 것도 아니고요. 하지만 그걸 쓰는 사람들을 변태라고 생각하는 건 잘못되었다고 생각해요.”

-그런 생각을 지금껏 깊이 못 해봤어요. 

“요즘 산부인과에서 아이 출산하면 이쁜이수술(질축소수술)까지 패키지로 붙어 있는 경우가 있잖아요. 우리 사회에는 자신의 성기를 제대로 본 적도 없는 여성들이 굉장히 많은데, 성기에 대한 시술이 이렇게 많은 이유는 뭘까요? 처녀막재생수술도 여전히 존재하거든요. 그런 것에 대해서 의문을 제기하고 싶었어요.”

2017년 1월, 박근혜가 파면되기 전 교육부가 발표한 ‘학교 성교육 표준안’에 따르면 초등학교 저학년 교재에 다음과 같은 내용이 담겨 있다. 

“(생식기의 관리) 남성은 ‘더러운 손으로’ 만지지 말고 여성은 ‘함부로’ 만지지 말아야 한다.”

오랫동안 여성에게 자신의 몸은 금단의 영역이었다. 그리고 앞으로도 그렇게 묶어놓을 것을 국가교육은 강제해왔다. 

<까칠남녀>에서 하차한 이유

-<까칠남녀> 얘기로 넘어가 볼게요. 방송사 측에서는 은하선 작가의 ‘부적절한 언동’이 하차 이유라고 말했는데, 그게 뭐죠?

“두 가지가 있어요. 성소수자 특집방송이 나온 날이 12월25일이었거든요. 그날 담당피디 개인연락처로 굉장히 많은 항의 문자가 들어왔어요. 말이 항의지, 굉장히 극단적인 성소수자 혐오발언들이었죠. 그 일로 피디도 굉장히 힘들어하셨고요. 그래서 제가 페이스북에 퀴어문화축제 후원 전화번호를 올리면서 이게 피디님 연락처니까 항의하실 분은 여기다가 문자를 보내라고 했죠.”

-비꼬는 농담 같은 거였군요.

“네, 근데 실제로 거기 문자를 보낸 사람들이 있었던 거예요. 거기 문자 보내면 한 통에 3천원씩 빠져나가거든요. 그래서 제가 ‘사기를 쳤다’고 누가 방송국에 민원을 넣은 거예요.”

-항의문자 보내던 사람이 넣은 민원이었겠군요.

“그렇죠. 그래도 그건 하차까지 시킬 정도는 아니어서 권고만 했는데 두 번째 더 큰 사건이 있었다는 게 담당 시피(CP: 피디팀장) 주장이에요.”

-그게 페북에 올렸다는, 십자가 모양의 딜도(자위기구) 사진인가요?

“맞아요. 구글에서 검색해서 올린 사진이고, 제가 만든 것도, 가진 것도, 사용한 것도 아녜요. 왜 올렸는지 내용도 안 썼어요. 그냥 ‘사랑의 주님’ 그게 다예요. 2016년 1월에 올린 사진인데 2년 전 페북까지 뒤져서 누군가 찾아낸 것 같아요. 그게 신성모독이라는 거죠. 종교를 조롱하고 혐오했다고.”

-기독교인 입장에서 기분이 나쁠 수 있겠지만, 처음부터 그것 때문에 까칠남녀에 대한 보수교단의 항의집회가 시작된 건 아니잖아요?

“그런 의미에서 두 가지 결격사유를 논하는 것 자체가 사실 큰 의미는 없다고 보고요. 결국은 호모포비아들의 반발을 방송국이 수용했다고 봐야겠죠. 어차피 방송도 2회밖에 안 남았는데, 제가 방송에 복귀할 수 있을 거라고 기대하진 않았어요. 그래도 이대로 묻어둘 수는 없다. 공론화는 해야겠다 생각했죠.”

-개인적으로도 엄청난 악플과 험담에 시달렸을 텐데.

“전 사실 그런 거에 크게 스트레스 안 받는 편이에요. 제가 일베나 남성연대 커뮤니티에 들어가서 찾아보면 ‘저런 ×는 시집을 못 가게 막아야 한다’거나 자위를 너무 해서 질이 우주만큼 커졌을 거라고 ‘허벌○○' ‘갤럭시○○'이라고 절 욕하는 사람이 많아요. 저는 여자들이 그렇게 취급당하는 것에 대해서 문제제기를 하는 사람인데, 내가 그렇게 취급당하는 걸로 마음 상하거나 하진 않아요. 글감으로 생각하죠.”

어디서 나온 걸까? 저런 단단한 자존감과 확신은? 부모님의 영향이냐고 물으니 아니라고 그는 조용히 고개를 저었다. 부모님은 정치적으로 진보적인 엘리트 출신이지만, 자녀교육이나 성문제에 있어서 특별히 리버럴하거나 관용적인 편은 아니었고 자녀에게 거는 높은 기대만큼 칭찬에 인색하고 엄격한 보통의 부모들과 크게 다르지 않았다고 했다.

그는 자신이 단단해진 계기가 이십대 초반에 겪었던 일련의 사건들 덕이라고 했다. 그 사건은 끔찍한 일이지만, 사실 보기 드문 일은 아니다. 많은 여성들이 겪었던 일, 그러나 몰이해와 편견이 두려워서, 혹은 스스로 잊기 위해 덮어두었음직한 일을 은하선은 터뜨렸고 공론화했고 맞서 싸웠다. 외롭지만 스스로 선택한 길이었고, 주변의 시선보다 자신의 내면에 충실할 수 있는 용기를 얻는 과정이었다.


처음부터 용감한 건 아니었다

은하선은 관악기를 전공해서 예중, 예고를 거쳐 2008년 음대에 진학했다. 초등학교 때부터 대학에 들어갈 때까지 같은 선생님에게 레슨을 받았는데 그 선생님한테 계속해서 성추행을 당했다. 다른 아이들도 비슷한 일을 당하고 울면서 뛰쳐나가곤 하는 모습을 봤지만, 누구도 대놓고 입에 올리지 않았고 은하선도 대학에 입학할 때까지는 그 일에 대해 얘기할 엄두를 내지 못했다. 대학생이 된 뒤 은하선은 같은 학교 강사로 출강하는 그 선생님에 대해 글을 썼고 그 글이 퍼지면서 선생님은 권고사직을 당했다. 그의 나이 스무 살 때의 일이다.

-제일 힘들었던 점이 뭐예요?

“그 선생님 밑에서 공부했던 애들이 경찰에 와서 나에 대해 ‘걔가 왜 그러는지 모르겠다’고 선생님을 옹호하는 진술을 하고 갔다는 얘기를 들었을 때, 분명히 지들도 당하는 걸 내가 봤는데 ‘아니다. 우리 선생님은 내가 딸 같아서 그랬다’고 말할 때, 같은 관현악과 학생들 중심으로 ‘그 선생님은 문제가 없고, 내가 이상한 애’라는 탄원서 서명이 돌았다는 걸 알았을 때, 그리고 같은 과 교수님들이 ‘음악을 계속하고 싶으면 그 선생님한테 잘못했다고 빌어라’ 이야기할 때…. 정말 분노했어요. 그런 일들을 겪으면서 강해졌다고 봐야죠.”

적당히 입 다물고 넘어가지 않는 용기를 내는 건, 처음이 힘들지 그 뒤론 한결 수월했다. 학교 수업 중에 ‘성의 이해’라는 과목이 있었는데 학교에 개설된 지 16년이나 된 인기 강좌였지만 강의 내용은 도무지 납득할 수 없는 수준이었다. 

-뭐가 문제였는데요?

“사후피임약을 먹으면 죽을 수도 있다는 둥, ‘아주 많이 하면 아주머니, 할 만큼 하면 할머니’ 같은 얘기, 그리고 자기는 안 본 포르노가 없으니 ‘직접 찍어오면 에이 플러스(A+)를 주겠다’는 얘기까지….”

-진짜 황당하군요.

“참을 수가 없어서 학교 안의 양성평등센터를 찾아갔어요. 근데 명백한 성희롱으로 보기 어렵다고 도와줄 수 없다고 하더라고요.”

-그때만 해도 지금이랑 기준이 다른가? 어떻게 그럴 수 있죠?

“잘 모르겠어요. 그래서 어떻게든 증거를 모아야지 생각하고 수업에 들어가서 강의 내용을 다 녹음했어요. 집에 와서 녹취를 풀고 문제 발언을 트위터에 연속으로 올렸죠. 대자보를 만들고, 학장님한테 서한도 쓰고, 성명서를 만들어서 단체들의 연명도 받고, 언론사에 제보도 하고…. 그 사건이 기사화되면서 학교에서 결국 그 강좌를 폐강시켜버렸어요.”

은하선은 오랫동안 자신을 짓눌렀던 억압과 부당한 현실에 맞서며 씩씩하고 당당하게 자기 목소리를 키워갔다. “저렇게 밝고 긍정적인 애가 성폭력 피해자일 리 없다”는 주변의 쑥덕거림도 귓등으로 넘겼다. 대학 졸업 후, 그는 독일로 유학을 떠나서 대학원에 진학했고 운 좋게도 베를린 필의 수석한테 마스터 클래스를 받게 되었다. 그러나 그곳도 예외는 아니었다.

-마스터 클래스에서 무슨 일이 있었어요?

“그때 치마를 입고 있었는데 그 사람이 제게 ‘너 남자 선생님한테 레슨 받으러 올 때는 그렇게 짧은 치마 입고 오지 마. 난 지금 네 연주가 하나도 안 들리고 네 다리만 보여’ 하는 거예요. 그 얘기에 다들 와아 웃고…. 다른 유학생 친구들도 레슨해 주는 선생님한테 데이트하자는 끈적끈적한 메시지를 받곤 하는 걸 보면서 이건, 뭐 한국만의 문제가 아니구나 생각했어요.”

그는 독일에 있는 동안 여성 웹진 이프에 틈틈이 썼던 칼럼을 대폭 보강해서 2015년 <이기적 섹스>라는 제목으로 책을 냈다. 책은 열흘 만에 2쇄를 찍을 만큼 성공적이었다. 본명 대신 은하선이란 필명으로 알려지게 된 것도 그때부터였다. 음악에 미련이 없는 건 아니었지만, 그는 짐을 꾸려 2016년 한국으로 돌아왔다. 지금 은하선은, 만난 지 6년째 되는 여성 파트너와 고양이 두 마리와 한집에 살면서, 글을 쓰고 강의를 하고 이따금씩 연주도 하고 노래도 만들며 살고 있다. 

성에 더해 더 자유롭게 얘기한다?
“역으로, 대다수 여성들이 성에 대해
말하기 힘든 상황이라는 뜻”
“토이숍 소비자로 등장하는 것과
섹스의 주체로 등장하는 건 별개”

“페미니즘은 기존의 양분법적인
섹스 스펙트럼을 깨부수는것” 
“난 섹스를 많이 하라 말한 적 없다
많이 하든 적게 하든, 여성들에게
편협한 잣대 들이대는 것에 문제제기”

나에게 섹스란?

-이성애자로 살다가 처음 여성을 만난 게 2012년이라고 했는데 그 이후론 계속 여성만 만나고 있는 거네요. 양성애 성향은 타고나는 겁니까? 후천적으로 형성되는 겁니까?

“저는 타고나고, 안 타고나고는 전혀 의미가 없는 얘기라고 생각해요. 기독교에서 하도 ‘니네는 바꿀 수 있는데 왜 안 바꾸니?’ 하니까 선천적인 측면을 강조하게 되지만, 사실 그보다 중요한 건 타고난 것이든 선택한 것이든 그런 걸로 비난받지 말아야 한다는 거라고 생각해요.”

-요즘 여성주의 안에서도 스펙트럼이 다양해지면서 트랜스젠더를 어떻게 볼 것이냐에 대한 논쟁이 벌어지고 있는데, 어떻게 생각하세요?

“페미니즘 자체가 기존의 양분법적인 젠더 스펙트럼을 깨부수는 거잖아요. 퀴어담론을 페미니즘과 분리된 것이라고 보는 시각에 대해서 전 이해하기 어려워요.”

-섹스에 대해 글을 쓰고 섹스토이를 팔고 강연을 합니다. 당신에게 섹스란 뭐죠?

“음, 전 섹스를 좋아하지만 섹스에 관심이 없기도 해요. 평소에 섹스 얘기를 자주 하는 것도 아니고, 글 쓰고 강의할 때나 하죠. 사람들은 제가 섹스칼럼니스트라고 하니까 매일 밤 파티에 가거나 매일 밤 섹스에 몰두한다고 생각하지만,(웃음) 그렇지 않다고 하면 좀 실망하는 것 같아요. ‘나랑 다를 바 없네’ 하면서. 근데 저는 섹스를 많이 하라고 한 적이 없어요. 많이 하든, 적게 하든, 안 하고 지내든 누군가에게, 특히 여성들한테 편협한 잣대를 들이대는 것에 대해서 문제제기를 하는 것뿐이지.”

-결국 다양한 사람들의 취향과 욕구를 존중하고 인정해야 한다는 말씀인데, 그렇게 성의 다양성을 인정하는 것이 우리 삶에 어떤 의미가 있을까요?

“다른 사람을 바라보는 시선 자체가 달라지겠죠. 지금 보수 기독교를 보면 알 수 있듯이 성은 종교적인 것, 정치적인 것과 다 결합이 되어 있잖아요. 성의 다양성을 인정한다는 건, 나와 다른 사람을 대하는 방식이 변화한다는 뜻이기도 하고, ‘내 안의 이상함’을 한결 편안하게 받아들일 수 있게 된다는 뜻이기도 해요. 사람이 평생 스테레오 타입으로만 살아갈 순 없잖아요. 자기 안의 욕망이 나중에 발견될 수 있고 몰랐던 부분을 새롭게 깨달을 수도 있는데, ‘나 왜 이렇게 됐지?’ 부정하지 않고 새로운 변화를 반갑게 맞이하는 것. 그런 시각이 필요한 거죠.”

예상했던 것보다 섹스칼럼니스트 은하선과의 대화는 야하지도, 위태롭지도 않았다. 그는 지면으로 옮길 수 없는 여러 ‘적나라한’ 용어들을 입에 담았으나 나는 그 싱싱한 말들의 자연스러움을 그대로 옮길 수 없어 안타까울 뿐이다. 자크 라캉은 ‘인간은 타인의 욕망을 욕망한다’고 말했다. ‘내가 욕망하는 것은 나의 것인가?’ 은하선이 거듭 던지고 있는 질문이다.

“이제 내 몸의 소리에 귀를 기울여 보자. … 중요한 건 ‘남의 욕망’이 아니라 ‘내 욕망’을 아는 것이다. 그리고 내가 찾아낸 ‘내 욕망’을 입 밖으로 낼 수 있어야 한다.”(<이기적 섹스> 87쪽 중에서) 녹취 이수현

기사입력 2018-02-10 10:06 최종수정 2018-02-10 13:41

http://news.naver.com/main/read.nhn?mode=LSD&mid=sec&sid1=102&oid=028&aid=0002398346


자료실_관련뉴스 게시판의 이전글 다음글
이전 미투 이후, 나는 이렇게 싸우고 있다
다음 성추행 ‘침묵의 장막’을 걷어내다
  • 목록 인쇄[새창열림]

빠른 이동 메뉴

quick
  • potal
  • 중앙도서관
  • E클래스
  • 학사정보
  • 장학정보
  • 증명서발급
  • 취업정보
글자화면확대화면축소top
아주대학교
  • 우)443-749 경기도 수원시 영동구 월드컵로 206 아주대학교 신학생회관 418호 TEL: 031-219-1744,1745
  • COPTRIGHT(C)2013 Ajou University. All Right Reserved.
  • 담당자에게 메일 보내기[새창열림]